시험 공부 하다가, 문득 (2025.06.10.)

아벨리타 2025. 6. 21. 17:28
 자기의 모습은 푸줏간 속에 숨겨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남몰래 세상 돌아가는 틈새를 지켜보다가 시대의 변고가 생기면 자기의 소원을 실현하려는 자는 호민豪民이다. 무릇 호민이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존재이다. 호민은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의 형세가 편승하기를 노리다가 팔을 휘두르며 밭두렁 위에서 한 차례 크게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저들 원민怨民들은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도 함께 외쳐대기 마련이다. 저들 항민恒民이란 자들도 역시 살아갈 길을 찾느라 호미·고무래·창자루를 들고 따라와서 무도한 놈들을 죽인다.
 (중략)
 대저 하늘이 사목司牧(임금)을 세운 것은 양민養民하기 위함이고, 한 사람이 위에서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 메워도 차지 않는 구렁 같은 욕심을 채우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중략)
 백성들이 내는 세금이 5푼이라면 공가公家(관청)로 돌아오는 이익은 겨우 1푼이고 그 나머지는 간사한 사인私人에게 어지럽게 흩어져버린다. 또 고을의 관청에는 남은 저축이 없어 일만 있으면 1년에 더러는 두 번 부과하고, 수령들은 그것을 빙자하여 마구 거두어들임은 또한 극도에 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백성들의 시름과 원망은 고려 말엽보다 훨씬 심하다. (중략) 백성 다스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 두려워할 만한 형세를 명확히 알아서 전철을 고친다면 그런 대로 유지할 수 있으리라.

 -성소부부고, <호민론> (출처: 옛 문인의 삶과 사상 문학으로 만나다, 세종출판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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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시대를 당하여 이런 내용을 공부하고 있으니 문득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턱 막힌 듯 하아, 탄식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허균의 <호민론>의 백성을 분류한 세 갈래 중 '호민'이 그렇다. 지금 상황에 들어맞지 않나.

 틈새를 호시탐탐 노리다 어지러운 그때 덜컥 박차고 일어나 호령하고 제 몫을 차지해보려는 무리가 있다. 중국의 옛 역사에도, 우리나라에도 궁예, 견훤처럼 호민이 있었다고 하니 어쩌면 호민 자체는 없앨 수 있는 존재가 아닌지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다. 몇천 년과 몇백 년의 간격을 뛰어넘어 호민은 이렇게 우리 곁에 함께하고 있으니.

 호민이 없앨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그 싹을 쳐내기가 애초 불가능한 것이라면, 결국 호민이 아닌 호민이 떠세하도록 판을 깔고 이끌려가는 원민과 항민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다면, 원민과 항민이 호민을 따를까. 원망하는 백성 원민은 나라를 원망할 일이 없으면 생기지 않을 것이고, 항민은 항상 그런 대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뿌리박은 땅이 구태여 뒤흔들고 못살게 굴지 않는다면 늘 그런 대로 체제의 가장 아래 버팀목의 구실을 해낼 것이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호민, 항민, 원민은 누구인가.

 

 경제가 어렵고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 제 한 몫 챙기고자 일어난 극우 세력. 역사를 부정하는 전직 한국사 강사 전한길, 집회로 세력을 끌어모아 선동한 전광훈 목사와 일부 교회 세력, 법치와 민주주의에 맞서고, 거짓과 선동으로 사회의 혼란을 키운 정당 국민의 힘이 바로 호민이 아니겠는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설움과 원망이 있는 이들은 커뮤니티에 동화되어 그런 호민의 말을 믿고 따르는 장기말이 되었을 것이다. 서부지법에 쳐들어가 폭동을 벌인 것은 그들이 그 행위를 '부정한 국가권력의 작용에 저항하는 의거'로 보았기 때문이다. 성급한 정의감에 도취된 그들은 진위를 구분하지 못하고, 폭력을 자행함으로써 스스로 정의롭지 않음을 증명했다. 그들이 형체 없는 분노에 몸을 내맡겨 부정의의 화신이 된 것은 표면적으로는 호민의 호령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 보면 그들이 정치인의 선동에 넘어간 이유가 무엇인가? 호민의 선동이 바늘처럼 쿡 찔렀을 때 욱 튀어나오는 원망의 소리가 있었음은, 그 방향이 옳든 그르든 간에 우리 사회 이면에 드러나지 않는 문제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그 원민이란 사람들도, 현실 문제의 실태를 바로 보는 눈이 있었으면 좀 좋았겠지만.

 어쩌면 허균의 이론으로 오늘 상황을 빗대는 건 부적절하겠다, 는 생각이 글을 쓰던 중간 즈음에 들었다. 허균은 호민이 지배받는 백성 중 하나라고 했지, 하지만 오늘날 혼란의 주도자의 큰 비중은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거대 정당이다. 12.3 계엄 사태를 '친위 쿠데타'라고 이르는 것은 말 그대로 당시 이미 정권을 잡고 있던 권력자가 제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일으킨 친위적 성격의 쿠데타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참 웃기지 않나? 호민이 집권층인데, 그 호민의 호령에 으랏차 따르는 원민은 피지배층이라. 허균 선생님도 이 상황을 봤으면 우습다고 했을 거다. 호민은 영악한 거고, 원민은 멍청한 거다. 원민이 가진 원한이 무엇이든 그것의 사회적인 책임은 집권하고 있는 이들에게서 온 문제일 텐데,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호민이 말하는 대로 따라가고 있으니 아둔하고 어리석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호민과 원민의 뿌리를 뽑을 순 없을 것이다. 농민이 도적 되고 도적이 농민 되듯 그 부류는 영구한 것이 아니니까. 배고프면 도적 되고, 배부르면 양민 되는 법인데.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이재명 대통령님의 재임 전 말대로 민생 안정일 것이다.

 민생이 안정되어야 호민이 들고 일어나지 않는다. 민생이 안정되어야 원민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오늘날은 항민은 항민이 아니라 우민愚民이구나.

 

 공부하던 중에 문득 떠올라서, 아무렇게나 휘갈기다 보니 뭔가 글이 길어졌는데. 현실을 바로보는 눈을 기르자고 혼자 다짐하는 의미에서 작성해두는 게 낫겠다 싶어 썼다.